독서 후기/자기계발

알면 인생 바뀌는 레전드 지혜 - [다산의 마지막 질문]

제과점장 린곰 2024. 1. 26. 18:43

다산 정약용이 내게 물었다.

"님 왜 그렇게 사셈?"

"삶을 바꿀 것인가, 아니면 계속 지금처럼 살 것인가?" - 349p

 

목차

 

즐기는 자 모드

스스로를 사랑해야 하는 개쩌는 이유

묻노니, 이유를 아는가?



 


즐기는 자 모드

 

여러분, 이 말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저는 이 말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좋아하고 즐기는 일이 장땡이구나!'

어린 날이었기에 그냥 간단하게만 여겼죠.

 

여러분은 '즐기는 것'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즐기다'라는 말은 그냥 재미있는 것 아닌가요?

재미있으니까 계속하게 되고, 즐거우니까 누가 말려도 하게 되고.. 뭐 그런 거 아닙니까?

 

'즐기는 자'는 사실 여러 속뜻을 품고 있어, 딱 어느 하나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저의 견해를 짚는다면 말이죠.

저는 [논어]에서의 '즐기는 자'는 상황에 초연한 경지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경지라기보다는... 삶의 태도라고 불러야 맞을 겁니다.

왜냐하면 '즐기는 자'는 레벨 채우는 것처럼 올라서면 끝인 게 아니거든요.

 

[논어]의 '즐기는 자'는 '위버멘쉬Übermensch'와 매우 비슷하다고 봅니다.

니체가 삶의 이상향이자 목표로 제시한 인간상이죠.

니체의 유명 저서,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펼친 바를 봅시다.

니체는 사람의 성장 단계낙타, 사자, 어린이로 보았습니다.

 

낙타주어진 운명을 버티는 인간상입니다.

온갖 짐을 등에 이는 낙타처럼, 자신의 삶의 무게를 버텨나가는 사람입니다.

창작물에서 자주 나오는 부모님이 낙타의 전형적인 예시입니다.

나를 키우기 위해 평생을 일만 하시고, 쉬는 시간도 없이 자신의 삶을 팔지요.

힘든 내색도 없이 묵묵히 일만 하십니다. 

 

이런 삶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나 하지 못하는 책임을 이고 계시기에 박수받아야 마땅합니다.

'자식'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계신 '아버지'는 그 존재로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그것의 무게만큼 강인한 자신을 보고 만족하는 단계입니다.

 

사자는 이다음 단계, 주어진 운명에 반항하는 인간상입니다.

'이것이 나의 삶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라고 소리치는 단계입니다.

나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비판의 극치라고 볼 수 있어요. 

 

부모님들이 아마 이 말씀을 자주 하셨을 겁니다.

'대학만 가면 된다!'라고 말이죠.

하지만 세상은 어떻죠?

대학만 가면 끝인 세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대학에 들어갔는데, 제 상상과는 너무나 달라요.

강의에 알바에 조별과제에 이게 진정 내가 바란 것인지... 하는 의문도 생기죠.

 

'그러니까 대학 안 가도 되는 거라고 말하시는 건가요?'

...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잠깐 기다려주시죠. 

 

기존의 지시, 관습, 윤리, 규범, 법 등은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없이 수정되어야 하고, 고쳐나가야 할 것이 많은 미완성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점을 눈여겨보지 않고, 그저 '따라야만 하니까' 따릅니다.

 

기존의 모든 가치는 무너질 수 있고, 부숴야만 마땅한 것들입니다.

모든 질서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모든 혼돈이 나쁜 것은 아니지요.

대형마트 주말 규제를 많은 이들이 불편해했고, 효과 없는 정책이라고 말했듯이 말이죠.

나라가 정한 '질서'가 과연 정말 옳은 것이었을까요?

 

하지만 '질서'는 옳을 때가 많습니다. '혼돈'은 나쁠 때가 많지요.

대학 가라는 부모님의 말씀은 대체로 옳습니다.

왜냐면 대학을 가면 학식이 넓어지고, 전문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학을 가면 더 좋은 삶을 살게 될 겁니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대학이 필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세상에는 대학에서 가르칠 수 없는 지식을 원하는 사람이나, 인생 경험을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저 성적 맞춰서 원하는 과 대신 이름값 높은 대학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이에게도 '모두' 대학이 필요할까요?

 

세상에는 70억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고, 한국인은 5천만 명이나 됩니다.

5천만 명 모두에게 맞는 정답? 그런 건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맞는 정답을 찾아나서는 태도가 정답에 가까운 것이지요.

타인이 정한 길을 그대로 가는 걸 '내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고난도 스스로 겪어야 고난인 겁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뭐라 하시든, 부모님은 절대 우리가 아닙니다.

정말 슬프게도, 우리는 영원히 타인입니다. 너가 내가 될 수 없어요.

그렇기에 타인의 방향은 애초에 '나의 방향'과는 거리가 멉니다.

타인이 정한 길을 탈선하기 시작하는 반항의 단계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며 판단하라고 말하는, 니체의 사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린아이, 니체의 최종적인 인간상입니다. 

니체는 이 단계를 위버멘쉬라고 불렀습니다.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

 

말이 참 어렵죠?

어린아이는 우선 순진합니다. 아는 게 없기 때문이지요.

'아는 것'은 선입견을 뜻합니다.

사회가 만든 고정관념에 비춰 미루어 판단하는 게 없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잘 잊습니다. 조금 전에 어머니에게 혼났더라도 어느새 웃으며 다가오지요.

실패와 고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구해 나갑니다.

 

어린아이의 순진무구와 망각은 지나간 것에 집착하지 않는 무소유의 정신입니다.

항상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지요.

 

어린아이는 항상 즐기며 놉니다. 어느 것 하나 즐기지 않는 게 없어요.

삶을 놀이로 생각하고 그것을 사랑합니다.

끊임없는 놀이를 통해 질리지 않고 긍정하며 자신의 인생관을 새롭게 만들어 나갑니다.

실패했다면 그것을 영원토록 하지 말라는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라고 받아들이는 거죠.

 

그냥 대학 가고, 안 가고를 떠나서 '무엇이 더 내게 옳은 선택일까?' 하고 고민하는 태도.

더 나은 창조를 위해 파괴를 감행하는 창조적 파괴의 마음.

진정한 '나'를 깨달아 무엇이 더 내게 옳은지 아는 단계입니다.

'부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부순 이후 무엇을 만들어 성장할 건지 정하는 단계입니다.

 

마치 레고놀이 같은 거죠. 

무언가 멋진 것을 만들었지만, '더 멋진 것'을 만들기 위해 이미 만들어낸 작품을 부수는.

기존의 작품을 부수는 과정은 심적으로 힘들 수 있지만요.

'어린아이'는 늘 이것만 생각합니다.

'이제 뭘 만들까?'

지치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아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레고가 부서지더라도, 아이들은 다시 멋진 작품을 만들 겁니다.

순전히 창작의 과정을 즐기면서요.

 

니체의 위버맨쉬인 '어린아이'와 [논어]의 '즐기는 자'가 상당히 닮아있다고 느꼈습니다.

삶의 상황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능력이 어디까지 닿는지 시험하고 즐기는 자세.

실패를 빠르게 잊고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 마음가짐.

삶의 무게를 버티어나가고, 합당치 않은 것은 고칠 줄 아는 태도.

이런 성품들이 모이고, 하루하루 실천해 나가는 사람이 바로 '즐기는 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냥 잠깐 실천한다고 '위버멘쉬'고 '즐기는 자'가 아니란 겁니다.

게임 레벨처럼 노력 안 해도 50Lv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노력하지 않으면 다시 1Lv로 떨어지게 되는 게 인생입니다.

경지가 아닌 태도라고 말한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옳은 길을 끝까지 걸어 나가는 고난길을 걷는 것은 언제나 힘듭니다.

허나 매일을 그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 내는 것이 이상적인 인간상이라고 공자와 니체는 말합니다.

 

"고난 속에서 즐거움마저 잃는다면 진정 지옥이 아니겠는가?"

 


 

스스로를 사랑해야 하는 개쩌는 이유

 

'선비는 뜻이 크고 강인해야 한다. 짐은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을 자기 짐으로 삼고 있으니 책임이 무겁지 않은가?'
'죽은 후에야 그만두게 되니 또한 멀지 않겠는가?' - [태백]

 

여러분은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인생은 여러분께 무엇이었나요?

행복, 즐거움, 고통, 놀이공원... 다양한 답이 있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삶은 전쟁터입니다. 

매일을 싸워야 하고, 뒤처지면 망하는 곳이 인생입니다.

누군가에게 삶은 솜사탕처럼 달콤한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새롭고, 다른 경험을 즐길 수 있는 오락실과도 같죠.

 

제가 생각하는 삶은, 자신을 찾아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찾도록 세상이 기회를 준 거죠.

어디 한번 찾아보라고. 진짜 너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찾았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그게 정말 너라고 생각하냐고.

끊임없는 시련을 통해 발굴하도록 만드는 거죠.

 

인생은 한 번뿐이기에, 다시 살 수도 없고 두 번 살 수도 없습니다.

잃어버린 '자신'은 절대 그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어떤 말을 들어도 투자의 책임이 오로지 본인에게 있는 것처럼 말이죠.

 

[태백]의 저 말처럼, 인생의 짐은 멀고도 무겁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 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비들의 '인'은 둘째 치고서도, '내 인생'도 버거운 게 인생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인仁'이 뭘까요?

'어질 인'이라는 한자 말처럼, 그냥 어진 게 인仁일까요?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논어고금주]에서 말합니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애인愛人)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나와 다른 무언가를 '사랑'씩이나 한다는 건, 정말 기적에 가깝죠.

내 몸처럼 아끼고, 혹시 아플까 염려하고, 잘 살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괜히 사랑이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단어겠습니까?

 

그럼에도 군자라면, '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본인 스스로에게 인할 필요가 있죠.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남의 '좋은 면'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실패, 추악한 마음, 시기와 질투, 욕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도 숨기지요. 

타인에게는 항상 빛나는 나만 보여줍니다. 멋진 나를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나는 이런 것이 아닌데.'라고 말하는 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모두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뻔한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말은 너무 많이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스스로에게 사랑받아야만 하냐?

왜 스스로를 사랑해야만 하냐?

그래야만 상처를 포용할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뭐 그냥 좋다~ 아무튼 좋다~ 그런 게 아닙니다.

스스로를 사랑해야만, '나의 상처'를 치료할 의지와 능력이 생깁니다.

그리고 '너의 상처'도요. 

 

우리는 살면서 갖가지 상처를 받습니다.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적도 있고, 내가 너무 못날 때도 있습니다.

인생의 나락까지 떨어진 경험이 있고, 사소한 차이 때문에 큰 무언가를 놓치기도 합니다.

외로움은 너무 심각하죠. 아무도 나의 의미를 알아주지 못할 것 같다는 공허함은 정말 지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일 아침밥을 먹고, 내일 일을 하고, 내일 잠에 들 겁니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헐뜯는 것은 큰 자기만족을 주기도 합니다.

'난 내게 이 정도로 무자비한 사람이야!'라는 타이틀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무심함과 엄격함에서 희열을 얻는 것이 그르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감정이라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런 일시적인 마음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이의 말로란, 그냥 대충 인터넷에 검색하기만 해도 나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아니, 낫게 만들 거라는 마음이야말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듭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별로니까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건데;;'라고요?

생각이 틀렸습니다. 순서를 바꾸셔야죠.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불쾌하고 불만족스러운 겁니다.

먼저 사랑하셔야죠. 인생은 항상 먼저 주어야 받습니다.

 

고난과 시련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를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

하현우의 <돌덩이>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뜨겁게 지져봐
절대 꼼짝 않고 나는 버텨낼 테니까
거세게 때려봐
네 손만 다칠 테니까
나를 봐 끄떡없어
쓰러지고 떨어져도 다시 일어나 오를 뿐야
난 말야 똑똑히 봐 깎일수록 깨질수록
더욱 세지고 강해지는 돌덩이

 

사랑은 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건 오직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과거가 있더라도, 내일은 그것과 다를 수 있고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의지.

그런 의지로부터 내일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옵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의 삶은 부드럽지만 단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은 자신의 삶을 해명하지 않고 증명한다."

 


묻노니, 이유를 아는가?

 

'태산보다 무거운 삶을 살아내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다만,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이 있고, 기러기 깃털보다도 가벼운 죽음이 있다'

 

이 말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하며 한 말입니다.

사마천은 48세의 나이에 생식기를 뿌리째 절단하는 '궁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죽음보다 더 치욕적인 형벌이었죠.

가뜩이나 명예를 중요시하는 당시의 문화로써는 자결하라고 돌려 말한 것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자신의 책,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위의 말을 남겼지요.

 

사마천은 자신의 삶의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을 결코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나의 인생은 [사기]를 작성함으로써 완성된다!'라고 여겼을지도요.

확실한 것은 사마천은 인생의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나는 왜 나로서 존재하는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왜 여기서 살아남아야만 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종류입니다.

바로 스스로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리어 왕King lear이 외친 말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

 

그 누구도 자신이 무엇인지 대신 대답해 줄 수 없습니다.

결국 그건 남의 정답이거든요.

오직 스스로일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인생을 걸고 내가 무엇인지 찾아 나서는 것. 

그리고 나의 '무엇'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인생 아닐까요?

 

빅토르 프랑클Viktor Frankl은 나치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습니다.

평화롭게 정신과 의사로서 살아가던 중,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기 시작했죠.

1944년 10월 19일, 아우슈비츠로 결국 끌려간 프랑클은 1945년 4월 27일 미군에 의해 풀려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수용소 생활 동안 여동생을 제외한 아내, 가족 모두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프랑클은 정말 지옥과도 같았던 수용소 생활을 보냈습니다.

'지옥'을 현실로 꺼내왔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나가는 추위, 간수들은 배불리 먹으면서 지급해주지 않는 식량.

누더기 옷, 비위생적인 환경. 점점 말라가는 신체는 인간의 모든 존엄과 기본권을 앗아갔습니다.

차별을 일삼는 군인들이 겨누는 총구는 없던 힘도 끌어와 노역을 하도록 만들었죠.

 

가장 참혹했던 것은 가스실입니다.

그저 무작위로 번호를 불러 사람들을 데려갔죠. 어떤 의미도 없었습니다.

돈 많은 사람, 건강한 사람, 여자, 아이, 무엇도 상관없이 그냥 번호만 불렀습니다.

그것은 그저 천둥번개과 똑같았습니다.

벼락에 맞으면 죽고. 번호를 불리면 죽는. 존재에 대한 어떤 자비도 없는 무심함.

불합리한 죽음이었죠.

 

그들이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가스실 덕분에 언제라도 죽음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덕분이었습니다.

굳이 자살함으로써 위로받을 필요가 없었던 거죠.

'죽음'과 '삶'의 경계는 너무나 흐릿해서, 그들은 모두 반 발자국씩 죽음에 발을 걸친 상태였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평소 삶을 살다가 수용소로 추락한 사람들의 절망이 얼마나 깊을까요?

하지만 이들은 발견해 냈습니다.

바로 '고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말이죠.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반응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좌우된다.' - 빅토르 프랑클

 

자극은 상황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죠.

태양이 뜬다는 상황, 추위가 몰려온다는 상황,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는 상황.

이런 상황은 칼이 되어 우리를 찌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응합니다.

보통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면 나도 그를 싫어하는 식으로 반응하죠.

하지만 이는 단편적이고 단순한 반응입니다. 1차원적이죠.

누군가 나를 찔렀지만 나는 그를 찌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극에 대해 나의 반응을 선택하는 것

얼마든지 찌르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너는 나를 찔렀지만 나는 너를 용서해서 안아주는 것.

불가능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우리는 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은 강인합니다.

 

프랑클은 아우슈비츠 감시자 독일군 측에 대한 일말의 저주도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비난과 험담 역시 없었지요. 

끝까지 한 개인의 심리가 '수용소'를 만나 어떠한 식으로 변형되었는지를 관찰했습니다.

사회에선 악독하기 그지없던 깡패가 오히려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주고.

누가 봐도 선하던 사람은 그저 희망과 절망에 메말라 죽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아 필생의 역작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완성해 나갑니다.

 

비인간적이었고 참혹했던 수용소 환경에서도, 사람들은 협력을 했습니다.

걸칠 옷이 없었음에도 자신의 누더기를 나누어주었고, 음식을 같이 공유했습니다.

그 속에서 자그마한 농담을 던지며 오늘 자신이 살아있음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귀족부인은 이 참혹한 홀로코스트 속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저는 남들이 해 주는 편한 것만 받고, 좋은 것만 먹고살았습니다.
진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를 뻔했죠.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내게 고난을 주신 신께 감사합니다.

 

길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걸음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인생'을 사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 수 없죠.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길을 걸을 때 날씨가 어떤지는 우리가 정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쏟아지는 빗방울에 화낼지, 빗방울의 감각을 기꺼워할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이 선택권이야말로 누구도 뺏어갈 수 없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가치를 감히 말할 수 없는, 반응에 대한 선택권입니다.

그야말로 특권이지요. 이게 특권이 아니라면 무엇이 특권이겠습니까.

 

절망에 돌돌 감겨 쓰러져 있는 인생이든,

오욕과 불명예 속에서도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하는 인생이든.

오직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습니다.

 

니체는 말했죠.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자신이 왜 존재하는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사는가?

그냥 사는 건 짐승도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벌레든 뭐든 전혀 다를 바가 없죠.

 

평생토록 일해서 대출 없는 자기 집 구하는 게 인생 목표고 사는 이유인가요?

그저 평생 놀고먹고 살고 자기 몸 편하면 그만이고 장땡인가요?

그런 인생이 정말로 자기 삶의 전부인가요?

한 번 되물어보세요.

'나는 무엇을 남기고자 하는가?'

'나는 진정으로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어떤 일을 이루고 싶은가?'

 

인생은 한 번뿐이기에,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가 살아가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이유를 달성하기 위해 버팁니다.

치욕 속에서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처럼,

수용소의 인간을 관찰하여 끝내는 '의미치료'라는 치료법을 만든 빅토르 프랑클처럼.

 

"인간은 자신의 행동으로써 자신을 증명합니다.

스스로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이번 책은 '조윤제'님의 [다산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정약용의 [논어고금주]를 바탕으로 [논어]에 대한 정약용의 지혜를 가득 담았습니다.

한 문장이라도 진심으로 깨닫는다면 인생이 바뀔 만한 레전드 지혜를 모아둔 책입니다.

특히, 이전에 읽은 많은 책들을 되새기게 하는 깊은 내용은 그야말로 일품이었습니다.

스스로를 한 번 관찰해 보세요. 과연 원하는 인생을 살고 계신가요?

정말 원하는 인생이라면 제가 감히 뭐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인생의 주인은 여러분이니까요. 주제넘은 말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인생을 원한다고 속이며 사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기만입니다.

자신의 존재에 책임을 지지 않는 비겁한 도피지요. 

인간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길고 어려운 글과 생각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손님들과 저를 위해 즐겁게 책을 굽겠습니다. 

- 제과점장 린곰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