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 거대한 소멸 앞에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우리는 서로 의지해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 무소유 요약
목차가지고 갈 것, 남기고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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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리뷰는 [무소유]에 대한 리뷰라기보다는, 그를 통한 저의 생각을 담았습니다.
'좋은 책은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책에 적으신 말처럼, 생각하는 독서를 실천하는 것이 예의라고 느꼈습니다.
가지고 갈 것, 남기고 갈 것
한 번 생각해보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죠.
죽음, 끝, 마지막.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지만, 끝이 제일 끌리는 표현이군요.
이 '끝'은 아주 거대한 불합리입니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원해서 태어났나요?
우리는 확률이라는 우연으로 태어났는데, 왜 죽음은 죽어야'만' 하는 걸까요?
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거죠? 이게 뭐라고?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
내가 살아온 날이 얼마인데! 내 친구들, 가족들은 어떡하라고!
이 모든 세월과 인간관계와 업적과 감정을 접어두고 반드시 떠나야만 한다니.
대체 왜죠?
저는 죽음이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저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방방 노력해 봤지만.
끝내 깨달았습니다.
'원래 그렇다'는 걸.
그래서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았죠.
모두에게 죽음은 평등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80살까지 잘 살아서 아들 딸 손주 손녀들이 있는 병실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것과,
제가 길을 걷다가 우연히 건설 자재가 떨어져 죽는 것은 같은 죽음이라는 겁니다.
사람을 등쳐먹는 사기꾼이 누군가와 싸우다가 칼 맞아 죽어도 저와 같은 죽음입니다.
남에게 늘 베풀기를 좋아하고 늘 봉사활동을 다니는 사람이 차에 치여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냥 '죽은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라 아프지 않게 갔네~ 나쁜 사람이라 천벌 받았네~
이런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는 이유가 없어요.
죽음에 늘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붙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그냥 언제나 있는 겁니다.
'나는 오늘 죽지 않아'라고 당연히 생각되더라도,
사고가 나거나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죽을 수 있죠.
늘, 언제나,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죽을 가능성'은 항상 곁에 붙어있습니다.
죽을 가능성이라. 아주 추상적인 말이네요.
알기 쉽게 이렇게 말해볼까요?
우리는 집에서 넘어져서 재수 없게 코뼈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잘못 넘어지면 뇌진탕에 걸릴 수도 있죠.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구르게 되면 목이 꺾여 운 나쁘게 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로는 또 어떻고요. 뒤에 어떤 미친놈이 갑자기 제 차를 들이박을 확률도 있습니다.
옆 차가 음주를 했는지, 졸음운전을 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냥 안 그러길 바랄 뿐이죠.
회사에 도착하면 괜찮을까요? 정말 천문학적인 확률로 심근경색이 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진짜 억울하지만, 음식을 먹다가 기관지에 걸려 숨을 못 쉬게 될 수도 있죠.
죽음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 붙어 다니죠.
이런 우연한 죽음을 끝까지 피하고 피해도, 우리는 결국 노화로 인해 죽습니다.
심장이 멈추고, 숨을 더 이상 쉬지 못하게 됩니다.
왜 노화로 인해 우리의 신체 기능이 멈추는지는 모릅니다.
그냥.. 아무리 도망쳐도 죽음은 우릴 쫓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100% 죽어요.
우리의 결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야기가 시작하면, 끝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책장을 덮듯이 우리의 인생은 막을 내립니다.
어떻게 죽든 똑같아요.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으면 급전개 드리프트고,
편안히 호상을 맞으면 차근차근히 빌드업된 죽음이죠.
죽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입니다.
왜 그래야만 하냐고 아무리 울고 한탄해 봐야 달라지지 않죠.
제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어떻게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모든 인간은 살았다 죽습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나 벌레나 하등 다를 게 없어요.
137억 년이라는 체감조차 어려운 시간 앞에서,
100년을 사는 인간과 100일을 사는 벌레가 다를 이유가 있나요?
40살의 중년이 여태 살아온 인생을 500번 다시 살아도 미치지조차 못하는 시간입니다.
우주적 관점에서는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그놈이 그거'라는 소리죠.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지녔더라도, 아무리 삶이 궁핍하고 빈곤했더라도 말이죠.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죽음에게 의미 없는 일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었더라도 우린 죽고,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 무력감과 공허함은 정말 참을 수 없습니다.
평생 사람을 구해온 소방관도, 누군가를 죽여온 살인마도 똑같습니다.
제가 인생에서 이뤄온 모든 일이 결국은 의미 없는 일이 된다니.
그럴 거면 대체 왜 사는 거죠? 어째서죠?
카뮈, 노인과 바다, 니체 철학, 하이데거, 사르트르, 논어, 도덕경...
많은 고전은 '사랑'이 인간의 의미라고 말합니다.
이 확정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서로 사랑함으로써 불안을 이겨내라는 거죠.
이 '사랑'은 다음 챕터에서 다루겠습니다.
죽음 앞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빈 손으로 왔고, 다시 빈 손으로 갑니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더라도 갈 때는 똑같죠.
우리가 모은 모든 재산, 업적, 학벌, 지위, 권력, 명예가 모두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러니 한 번 되물어보세요.
거대한 죽음 앞에, '나는 이렇게 살았다!'라고 당당히 내놓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 당당하다면 삼류 운동선수가 되든, 돈 못 버는 직업을 갖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든 위대한 영웅이 되든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삶을 거대한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할 거야?'라는 세상의 질문에 몸으로 답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이렇게 되는데?'라고 다시 세상이 물으면, 그것에 맞춰 새롭게 배우겠죠.
삶을 통해 인생을 제련하고, 깎아나가,
말미에는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인생으로 만드는 거죠.
'야! 난 이렇게 살았다! 어떠냐! 내 인생은 너에겐 몰라도 나에겐 의미 있었다!'
이렇게 외칠 수 있게요.
결국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게 죽음의 역할이 아닐까요.
죽으면 끝입니다. 그러니 끝이 오기 전에 우리의 대답을 정해야겠죠.
우리가 모쪼록 죽음 앞에 반짝이는 것들을 내놓을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인생이란 아마도 죽음을 배우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좋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다시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아는 사람, 소문으로 들었던 사람,
그 모든 것은 그 위에 있거나 또는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의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이론,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민,
서로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앞날이 촉망되는 아이들, 발명가와 개척자,
윤리 도덕의 교사들, 부패한 정치가들, '수퍼스타', '초인적 지도자',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중
우리는 너무나 작습니다.
온갖 절경을 가진 지구조차도 너무 거대해서 '위대하다'라고 생각됩니다.
자연이란 어떻게 이렇게 장엄하고 또 유기적일 수 있을까요?
칼 세이건의 저 말처럼, 스케일을 키우면 다 똑같아집니다.
우리가 보았던 모든 것, 느꼈던 모든 것, '인류'의 모든 것이 고작 지구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입니다.
우리가 개미를 보듯이, 저 멀리 우주에서 우리를 보면 우리도 개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너무나, 정말로 너무나 작아 우주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기도 미미합니다.
우주는 우리에게 아무런 정답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더라도,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기더라도,
온 세상이 알 정도로 유명하더라도, 지구에서 제일가는 석학이더라도 똑같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죽음이 똑같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죠.
살아 있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삶이 본질일까요? 죽음이 본질일까요?
우리는 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 걸까요?
죽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그냥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건데.
내가 아무리 잘 살았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입니까.
다만, 그것은 '인류의 정답'은 아니라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끝까지 무언가를 남기려고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사랑'이죠.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습니다.
이건 당연한 사실이죠.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아직 안 죽어봐서 모르지만요.
'나'도, '너'도, 그걸 알아차리는 감각도, 생각하는 능력도 모두 사라집니다.
저에게는 그냥 완벽한 무無로 돌아가는 일인 것 같습니다.
천국과 지옥, 윤회와 업보니 뭐니 해도, 그게 증명되진 않았습니다.
그러니 죽으면 끝, 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것이 옳게 느껴집니다.
존재란 대체 무엇인지, 나는 왜 태어났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왜 굳이 태어나야 했을까요?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인데.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 다자이 오사무, [사양]
부엌칼을 봅시다. 이것이 만들어진 이유는 뭘까요?
식재료를 자르기 위해서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용도가 정해져 있는 거죠.
물컵을 볼까요? 컵은 물 등의 액체를 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것도 태어나면서부터 용도가 정해져 있네요?
그렇다면 인간을 볼까요? 인간이 태어난 이유는 뭘까요?
음.... 어... 음.....
글쎄요?
딱 명확히 답을 내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돈을 위해? 명예? 권력? 번식을 위해? 뭐죠? 인간은 왜 태어났을까요?
우리의 본질은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인간이 태어난 이유'를 알려줄 수 없어요.
우리가 인간인데도, 인간은 왜 인간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어렴풋하게 짐작만 할 뿐이죠.
우리는 채 100년도 못 삽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디지털 전자기기를 쓰고, 맛있는 밥을 먹는 것 이유는 뭘까요?
간단합니다. 내 앞의 사람들이 해줬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남겼고,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을 남겼죠.
마이클 잭슨은 팝을 진보시켰고,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죠.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있는 이유는, 내 앞의 사람들이 해줬기 때문입니다.
나 대신 글을 만들어주었고, 나 대신 과학을 발전시켰고, 나 대신, 나 대신...
그런 수많은 '나 대신' 이룬 무언가가 모여 '나'가 만들어집니다.
쉽게 말해서 선대 사람들이 '남겨준 것'이죠.
우리의 몸도 '남겨준 것'입니다.
부모님이 서로 만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금 존재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만약 사람들이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구석기 동굴에서 '우가! 우가!'라고 외치고 있을 겁니다.
왜 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들여 글을 남기고, 과학을 남기고,
음악과 의학을 성장시켰을까요?
왜 인류를 위해 무언가를 남기고 발전시켰을까요?
단순하게 시간이 남아도는 이타적인 사람들이라?
아니면 자신이 죽으면 다 인식할 수 없어지는 것도 모르는 바보멍청이들이라?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럴 리 없죠.
'스스로의 인생이 의미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노력을 다해서 세상에 흔적을 남긴 겁니다.
인간의 모든 의미는 죽음 앞에 의미를 잃습니다.
아무리 사랑이라고 해서 멀쩡하지 않습니다.
사실 사랑을 남겨도 우리가 죽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왜 '사랑'해야 하는가?
그 편이 스스로 사라지더라도, 죽음을 최소한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루지 못하더라도 내 뒤의 사람들이 해 줄 거라는 믿음.
삶 동안 타인에 대한 배려를 통해 '사랑'을 남겨서 그만큼 세상이 이로워졌을 거라는 기대.
내가 여태까지 살았고 죽음으로써,
이 세상이 더 만족스럽게 살 만한 공간이 되었을 거라는 의미.
쉽게 말해서, 태어나 사라진 것 이상의 의미를 만드는 겁니다.
'죽어서 사라지더라도 내 의지는 남는다' 같은 거죠.
내가 죽은 후의 세계를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그게 남들과 세상을 사랑해야 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남을 만큼 똑똑하거나, 강력하다거나 하는 능력이 없어도 됩니다.
저런 위대한 사람만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남길 수 있어요.
바로 '주위 사람들에게 다정히 대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랑'입니다.
너무 간단하다고요?
원래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가 아닌 '너'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거 알잖아요.
게다가 잘 대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울 겁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틱틱 쏘아대는대도 참아내고 사랑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잘 대해야 하더라도, '나'를 포기해서야 될까요?
그 미묘한 줄타기와 균형 잡기를 위해서는 잘 배워야 합니다.
무례한 사람을 대하는 방법, 친구로 만드는 방법 등등...
어떤 태도가 나에게 옳을지 항상 고민해야 합니다.
무엇이 상대에게 좋을지 생각하는 공감력과 사고력,
그것을 실천하는 행동력과 더불어 끊임없이 배워나가는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세상 더러운 거 다 알지만, 기본적으로 남에게 상냥하기를 택한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라고.
혐오와 편견, 스스로를 과시하며 비교와 우열을 가리려는 환경에서도,
스스로 내면의 중심을 잘 잡고 나와 너를 사랑하는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아마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해탈하여 부처에 경지에 이른 게 아닐까요.
이 불안과 허무함이 가득한 세계에서, 사랑을 통해 조금 더 따듯하고 달콤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
그것이 거의 대부분의 철학, 종교, 가치관, 이데올로기의 핵심입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 아까 [사양]에서의 '혁명'이죠. 창조적 파괴, 철학의 망치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 책의 리뷰에서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능력은 사랑하는 능력."
녹은 그 쇠를 먹는다
<법구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이와 같이 그 마음씨가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는 뜻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대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 우리가 서로 증오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는 나그네들 아닌가.
- 법정, [무소유] 중
녹은 그 쇠를 먹는다.
참 말이 직관적으로 와닿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요즘 사회에 혐오가 만연한 것 같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비교, 과시, 우열 논쟁으로 인한 걸까요.
세상이 힘들고 고통스러워지며 ,
많은 사람들이 '남을 미워하는 것'을 마음을 달래는 한 방법으로 쓰고 있는 것을 압니다.
누군가에 대한 혐오를 통해 '나는 그들과 다르다'라는 우월감을 얻죠.
저게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독을 몸에 품고 있으면 스스로가 독에 걸리기 마련이죠.
남들을 향한 혐오, 시기와 질투는 스스로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간단하게 예시를 들겠습니다.
남들을 항상 미워하고 시기하는 A 씨!
이 A 씨의 인생은 경제력과 본인의 학력, 능력과 무관하게 불행할 겁니다.
오잉? 왜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 짓죠? 무슨 권한과 잣대를 들이밀길래?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이유입니다.
인간은 타인에게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A 씨가 있다고 쳐 봅시다.
A 씨의 '미워함'은 대상을 가리지 않아요.
사사건건 꼬투리에, 자기가 늘 말싸움에서 이겨먹으려고 하죠.
주위 사람들에게 톡톡 쏘아붙이고, 작은 실수에도 윽박지릅니다.
흠.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아들러 심리학이었다면 '내면의 우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테고,
프로이트 심리학이었으면 '어릴 때의 트라우마로 인한 자기 방어기제'라고 말할 테죠.
하지만 왜 그러는지 굳이 분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한 것만 보면 되거든요.
'정말로 저렇게 살면 행복해 보이시나요?'
'왜 불행한지'에 대해 제가 말하는 건, 매우 간단한 이유입니다.
바로 '인생은 자기가 행동한 대로 받기 때문에'죠.
너무 당연한 말이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스스로 먼저 남을 띠껍게 했으면, 남이 나에게 띠껍게 행동할 거라는 걸 굳이 말해야 하나요?
내가 먼저 남을 때리고 폭력적으로 대했으면, 남도 나를 때릴 거라는 걸 정말로 말해야 아나요?
너무 당연한 사실이잖아요.
물론 저도 압니다.
세상이 얼마나 억울하고 화딱지 나는지는, 어렴풋하게라도 알아요.
아무리 먼저 선물을 주었다 해도 그것을 다시 되돌려 받기란 힘든 일입니다.
먼저 잘해줘 봤자 뭐해요. 호의로 대하면 둘리인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도 알아요.
근데, 먼저 주지 않으면 평생 못 받습니다.
확률이 0%가 되어버려요.
세상 사람들을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어요. 비록 윤리적으로 올바르지는 않더라도요.
내가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나에게 나쁜 경험을 주는 사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것에 맞는 경험을 주는 대부분의 사람,
내가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내게 잘해주는 아주 드문 사람.
내가 아무리 사랑을 주더라도 나쁜 경험만 주야장천 받으면 의욕이 당연히 꺾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사랑하기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결국 그것이 행복에서 멀어지는 길이니까요.
나쁜 경험만을 받았다 해서 먼저 '좋은 경험'을 주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인생에서 '좋은 경험'을 받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교환비가 납득이 안되더라도 어떡합니까.
좋은 경험을 받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먼저 주어야 합니다.
인생은 먼저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당연한 사실은, '주려면 갖고 있어야 한다'라는 거죠.
내게 없는 것을 주는 일은 불가능하잖습니까.
스스로 무엇을 가지고 있냐에 따라 남에게 주는 것이 달라집니다.
남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다시 돌려받습니다.
결국 선순환이냐, 악순환이냐를 택하는 일입니다.
독을 품고 타인에게 독을 주어 스스로 독을 마실 것인지.
약을 먹고 타인에게 약을 주어 스스로 약을 받을 것인지.
스스로의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 일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인생이 행복하지 않았다면 한 번쯤 뒤엎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행복해지고 싶다면',
여태까지의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죠.
앞서 말씀드린 '사랑'을 통해 먼저 상대에게 다정히 대해 보세요.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면 처음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다 보면, 분명 알아주는 사람이 생길 겁니다.
그렇게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 더욱 주위를 사랑하세요.
우리가 죽은 뒤의 세계를 기대할 수 있게, 세상에 희망을 품고 이야기를 마칠 수 있게요.
"나는 수연 스님을 볼 때마다 느꼈다.
인생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문제라는 것을."
이번 책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입니다.
사실 책의 제목의 가장 유명한 내용은 "우리는 가진 것들에 의해 가져진다",
"너무 많은 소유를 통해 자신을 잃어간다"에 가깝다고 여겼습니다.
But! 그러나, 법정께서 이 말을 한 이유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의 고민과 답을 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감명 깊게 읽었던 터라 식상하게 내용 요약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책의 내용과는 꽤나 거리가 멀어진 리뷰지만요,
법정께서 말씀하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충실히 답했다고 생각합니다.
말마따나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살 지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리뷰를 작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책에 담긴 지혜와 통찰을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해드릴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봐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책은 160p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가벼운 책이니 한 번 꼭 읽어봐 주십시오!
길고 어려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손님들과 저를 위해 늘 책을 굽겠습니다.
- 제과점장 린곰 올림 -